00 Document #1



Project & Research Book
Publication date: December, 2007
ISBN: 978-89-960226-2-6
Format: 200 x 270 mm, 180 pages, B&W, paperback
Editing: Kyung Yong LIM, Jungyeon Ku, Seewon Hyun
Design: Jin Jung
Edition of 500
Out of Print

공공도큐멘트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 공동체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미술, 영화, 미디어, 음악, 만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 안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러 공동체의 인터뷰, 텍스트, 사진 등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 공공예술로 대표되는 예술 공동체를 설명하는 이론적 텍스트와 실제 사례 조사를 비롯해 러시아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동체 집단인 Chto delat와 대안 미디어 활동가인 코가와 테츠오의 글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섹션인 ‘조건들’ ‘도구들’ ‘연결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생활 안에서 연대와 호혜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움직임의 필요성을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활동가들이 스스로 저자와 대담자가 되어 풍성함을 더해준다. 일종의 프로젝트 북인 공공도큐멘트는 영화, 디자인, 미술에서 활동하는 3명의 편집자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리서치를 했으므로 다양한 영역 안에서 활동하는 자생적인 공동체들의 현재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00 Document' is a report on autonomous activities among various communities, individuals, groups in Seoul. Being divided into 4 sections, the report contains several articles and images. In the first section of ‘Conditions’, there are 5 texts which give us the principal outline of 00 Document project. Secondly, ‘Toolboxes’ like a case-study focus on studying the communities case by case in Seoul. All the cases that we selected here can not be considered as the ideal ones. Also, we did not intend to judge them with our own yardstick. Instead, the reason we called them ‘Toolboxes’ is to wish that their activities are functioned as one of toolboxes for all, not only for themselves. As the third section, ‘Connections’ show some texts excerpted from Chto delat, Activism Collective of artists, critics, writers, & philosophers in Petersburg and from Free FM movement activist, Testuo Kogawa in Tokyo. 00 Document project is attached to not the mechanical solidarity but multiplications based on the reciprocity. The final section is an attempt to visualize a heterogeneous fluxes of ‘00 Document’ in the map of Seoul collaborated with a designer Jin Jung. 00 Document project book is not devoted like an Anthology. Literally, we want this book to be functioned as a report to the reader. We hope that this report can be differentiated and multiplicated as a condition and a tool in various ways.

'00 Document in Seoul' was support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목차


다중 시대의 예술 12 - 조정환
정치적 예술의 가능성에 대하여: “예술의 정치화”에서 “예술의 생체정치화”로 18 - 홍철기
현실의 공황 장애와 미술 28 - 현시원 
제약과 자율 36 - 구정연
자생적 문화자본 공간은 공공예술의 기능을 취할 수 있는가: 사회적 설치로서 문화공간의 가능성 40 - 류한길


공공영역과 예술: 00도큐멘트의 여러 도구들 50 - 임경용 

-범주
혜화동 필리핀 시장, 문이 없는 ‘공동체의 허브(hub)’ 58 - 현시원
피자매 연대, 자매들의 아나키 62 - 현시원
다중 지성의 정원 66 - 조정환, 임경용 인터뷰
-운동
새만화책, 가까운 ‘지금 여기’의 새만화들 82 - 현시원 
아이공, 대안영화: 미디어의 형식적 실험을 통한 소수자의 주체적 목소리 찾기 86 - 김연호
자본주의, 매스 미디어, 공동체 라디오 운동 94 - 조동원
-제도
00마켓,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100  
활력 연구소, 기억에 대한 짧은 주장 106

연결들
무엇을 할 것인가? 114 - Chto Delat
행동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자율주의 120 -  Chto Delat
자크 랑시에르와 Chto delat 대담 : 폭발을 기대해선 안돼요 126
‘불화’의 철학자 랑시에르 146 - 최원
다형성의 라디오를 향하여 152  - 코가와 테츠오 
서울에서의 하루 8-172 - 정진열, 김경주 



공공영역과 예술: 00도큐멘트의 여러 도구들
임경용


A. 공공영역과 예술

공공영역(public sphere)과 예술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공공예술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설득력이 가질수록 공공영역과 예술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공공영역이라는 개념 안에서 사회에 의제를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는 자율적 기획들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모더니즘 전통 안에서 발견될 법한 이런 기획들은 이제 그 생명력을 잃고 있다. 세계는 더욱 분절되고 다양화되고 있으며 합의된 물리적/상상적 공간으로서의 공공영역은 유토피아에 대한 인류의 열망처럼 헛되고 실효성이 없는 텅 빈 개념처럼 느껴진다. 사적영역과 공공영역이 그 각자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비물질 노동이 사적인 시간에 침입하는 것처럼 공공영역의 법과 폭력이 사적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이처럼 공공영역과 예술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굳이 공공이라는 이름에 의존하는 것일까? 공공이라는 개념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에 대한 막연한 유토피아 공간으로 공공을 상상하기 때문일까?

반면 앞에서 이야기한 공공영역과 다르게 우리는 하위주체들의 공공영역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실제로 여러 사례들에게서 일종의 ‘맥락에 의존한 움직임’ 이라고 부를 만한 경향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영역은 정치 및 경제 제도/권력에 스스로를 노출하고 그들의 통제를 받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것과 마찬가지로 공공영역은 다양한 공동체들이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문화과학 23호, 공공영역과 사회운동, 2000년 가을호’를 참고할 것)

그러나 우리가 발견한 대상들에게서 연대의 움직임은 자율적인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느슨한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발견한 공동체 대부분은 느슨한 형태로 설립되고 운영되고 있었다. 이 말은 이들이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지금의 조건 안에서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할을 은폐하고, 위장하며, 축소하는 것을 통해 대안적 공공영역이라고 지칭할만한 (반) 연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부분의 공동체들이 자신들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공공영역(공론장)을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지금의 조건에서 대다수의 주체/공동체들은 ‘대화’가 아니라 이를테면 랑시에르가 말한 ‘독백’의 형태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불화로서의 철학자, 랑시에르 / 최원’을 참고)

이처럼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공공영역은 의미가 만들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운동이 서로 협상할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그러나 공공영역 안에서의 예술 활동은 예술의 자율성이 주로 강조되는데, 예술의 급진적인 속성을 강조하는 ‘경험의 자율성’ 과 예술가의 역량을 강조하는 ‘예술의 자율성’ 사이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는 것이다. 공공영역 안에서 예술은 ‘예술의 정치화’라는 문제를 상기시키지만 이 기획은 야심만큼 큰 효과를 거두고 있진 못한 것 같다. (이 책의 홍철기의 글과 자크 랑시에르, Chto Delat 대담을 참고)

특히 최근에는 공공예술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대중에게 경사되어 일종의 대중추수주의로 이어진 경향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공공예술 운동은 대중에게 경사되거나 혹은 예술의 자율성에 기반 하는 ‘차이’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역할이 요구된다.

이런 인식 안에서 예술과 공공영역을 함께 재고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분절된 공간으로서의 공공영역’을 상상하게 만든다. (Simon Sheikh, ‘In the Place of Public Sphere?’) 그러나 이런 분절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젠더, 인종, 종교 등의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 외부로 끊임없이 빠져나가려는 동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앞으로 살펴볼 여러 도구들은 이런 동기들이 결정화된 결과물은 아니다. 또한 이렇게 분절된 공공영역을 굳이 ‘공공영역’이라는 틀 안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들이 화해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토대는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그것을 공공영역이라고 불러보자.


B. 도구들

1. 규모의 정치
00도큐멘트에서 다루고 있는 소출력 FM과 진(zine) 문화는 퍼블릭 액세스 운동과 공공영역의 연계를 제시하는 사례이다. 이들 운동은 스스로 공공영역을 구축하며 확장하기 마련인데, 여기서 대안은 영역의 확장 보다는 영역의 협의성에 있다. 즉 공공영역이 특정한 물리적이고 협의적인 공간으로 가정되고 이 안에 있는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그 활동이라면, 그것은 여러 헤게모니 집단들 간의 투쟁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 일본의 프리 라디오 운동을 통해 코가와 테츠오가 주장하는 것은 소출력이라는 ‘한계가 가진 협의성’이다. (이 책의 코가와 테츠오의 ‘다형성의 라디오를 향하여’를 참고하시오) 보통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협의성이란 용어는 소출력 라디오 운동이나 진(zine) 문화의 생산과 유통에서 흔히 관찰되는 속성이다. 1와트, 많아도 10 와트에 한정되는 소출력 라디오는 그 송출 범위가 매우 좁다. 코가와 테츠오는 도쿄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와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이 송출 범위를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송출 범위의 한계를 소출력 라디오 운동의 본질로 진단한다. 또한 소규모 출판 운동인 진은 100 부에서 많으면 200부에 한정되어 있다.

여기서 협의성은 소수성과는 다른 맥락을 가진다. 소수성은 주어진 정체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반해 협의성은 좀 더 강한 밀도의 우연적 만남으로 정의된다. 도쿄나 뉴욕은 인구 밀도가 높기 때문에 1와트의 송출로 1천명 이상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반면 인구밀도가 낮다면 그 범위를 높여서 1천명의 청자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자본의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규모의 확대를 경계하는 것이다.

물론 협의성 자체가 가진 모순도 경계해야 한다. 협의성은 이질적인 것을 경계하는 순혈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투여에 대한 강력한 경계의 도구로, 혹은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 요구되는 협의성은 1980년대 일본에서 많은 기업과 쇼핑센터 등이 자신들의 홍보 수단으로 소출력 라디오를 소비했던 기억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비자본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체의 독립성은 그 규모를 통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규모의 정치는 매체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한다. 만약 이러한 규모의 문화 생산물을 누군가 소비한다면 그 (녀)는 그 행위를 통해 문화 생산 과정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블로그와 같은 소규모의 개인 컨텐츠 역시 대부분 제도와 자본에 의해 포섭되어 있지만, 소출력 라디오 운동과 자기 생산 출판물인 진(zine) 문화는 사적인 생산과 유통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공적인 속성은 집단 내부의 협의성이 아니라 집단이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나오게 된다. 실제로 일본의 프리 라디오 활동가인 코가와 테츠오는 아직까지 전 세계를 돌면서 이 운동을 전파하고 송신기 제작 워크샵을 하고 있다. 끊임없이 똑같은 내용을 전 지구적으로 반복하는 그의 활동은 자본주의적인 증식보다 감염에 가깝다. 그의 활동은 사적인 영역의 확장이 공적인 영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사적인 내용과 영역의 규모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자본과 공공영역의 합리성 이면에 존재하는 법칙과 폭력의 논리 때문이다.

2. 자기에 대한 아카이브 - 데리브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는 순간으로 데리브는 특정한 목적을 지닌다. 산책과 데리브(drift/표류)가 구별되는 지점은 ‘표류’라는 말이 가지는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략적인 목적의 결과라는 것이다. 데리브는 우연성을 제거하면서 자신 만의 구조로 도시를 객관화시키는 전략이다. 물론 여기서 객관화는 정보 전달 목적의 지도 그리기가 아닌 사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전유하는 방법이다. 데리브는 어떤 결과물과 연결되는데, 우선 사전 조사가 있으며 진행 가운데 축척되는 경험들이 있다. 데리브는 어떤 장소에 대한 가장 농밀하고도 이질적인 시간성을 병치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장소가 무엇이었고 앞으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도를 그릴 수 있는 도구이다. 이것은 도시 공간을 통해 윤리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데리브를 이야기할 때 ‘환경과 주체가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 즉 ‘환경과 주체가 소통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시는 그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변화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곳을 표류하는 데리버 역시 마찬가지이다. 데리버는 도시 안에서 자신이 보고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질을 획득한다. 도시의 여러 요소들은 각각 하나의 배치물일 텐데, 데리브를 통한 재구성 과정으로 도시는 다른 방식으로 발견되고 그 경험은 데리버에게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시각적인 과정에 한정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지도 제작자로서 데리버의 임무를 환기한다면, 그는 도시의 풍경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수정할 수도 있다. 과거 플라잉시티가 청계천에서 했던 프로젝트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표류로의 초대, 마로니에 미술관)

제5공화국 시절의 한강종합개발계획은 한강의 수질 개선을 목적으로 이뤄진 개발 사업이었다. 생태계를 무시한 무분별한 콘크리트 호안 설치 및 정비 사업은 한강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하천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5공의 개발 사업은 일종의 소유와 지배의 논리이다. 한강 수질 개선이라는 목표 지향적 과제는 돈으로 복구될 수 없는 생태계 파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간편한 수질 개선책으로서 개발과 계획의 논리가 한강뿐 아니라 한국의 전국토로 빠르게 전염된 것이다.

데리브는 이와 유사한 문제를 비교적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시작하기 전에 하나의 과제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고 아니면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도 있다. 결국 문제는 데리브를 통해 도시 공간 안에 중첩되어 있는 억압과 지배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것과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제도적 관용의 허구성도 인식할 수 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어쩌면 제도적인 관용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것만 생각하면 지금의 조건 하에서 스스로 내면을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데리브가 이러한 기획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데리브가 현실 안에서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는 페다고지, 자율적인 교육의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3. 공동체 경제
가라타니 고진이 주도했던 NAM(New Association Movement)은 비록 실패했지만 ‘노동 운동의 현실적인 전회’라는 의미에서 눈에 띄는 시도이다. (NAM에 대해서는 녹색평론 68호,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래틱’, ‘NAM의 원리’ 등을 참고할 것)

고진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잉여 이윤은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을 노동자가 다시 구입하는 것에서 온다고 지적하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자가 능동적인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소비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고진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본, 국가, 민족’의 3항을 동시에 고려해야 된다는 것이다. 고진은 봉건 사회를 예로 들면서 자본(농업 공동체)과 국가(봉건 국가), 민족(도시)은 서로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으며, 경제 활동은 교환과 호혜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자본=국가=민족’의 삼위일체는 이 요소들이 강력하게 결합된 지금 세계 정서의 결과인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했지만, 고진은 이런 상상의 영역이 칸트가 서술한 일종의 ‘초월론적 가상’이라면서 그것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NAM의 어소시에이션이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며, 국가라는 ‘초월론적 가상’을 대체할 수 있는 영역까지 밀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 양자에 개입하는 대안 화폐, 공동체 운동이었던 NAM은 2년 정도 진행되다가 2002년 폐쇄되었다.

이런 현실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진이 언급하는 자본=국가=민족의 삼위일체와 어소시에이션 개념은 우리에게 재고할 거리를 던져준다. 세계화는 민족이나 국가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키고 자본의 세계화 역시 자본의 위상을 강화시킨다.

이 보고서에서 러시아의 행동주의 공동체 Chto Delat는 자랑스럽게 자신들이 돈을 벌지 않고 이 운동을 지속시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잘 알려졌듯이 상황주의자들은 돈을 벌지 않았고, 간디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결과물을 소비하지 말하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소비를 하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다. 애드버스터(adbuster)가 진행하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이나 다양한 경제/환경 공동체의 저항을 통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전회를 이끌 수는 없을 것이다. 애드버스터 역시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활동 가운데 일부를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가공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근본적인 한계를 고려하고 거꾸로 생각해본다면, 소비의 공동체 경제 운동은 우리가 일상 안에서 국가=자본=민족의 3항 고리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적 활동이다. 모든 것을 사유화하고 상품화하는 자본주의를 흉내 내며 (mimic) 자신들의 활동을 유사-상품으로 구성하는 과정 안에서 애드버스터 그리고 00마켓은 공동체 경제 운동의 전범이 될 만하다.

자본주의를 흉내 내는 것은 자본화와는 다른 것이다. 흉내 내기는 하나의 능동적인 활동이며 지적인 전술이다. 지금의 조건에서 흉내 내기를 통한 상점과 상품들이 다양하게 분화할 필요가 있다. CGV 를 닮은 우리 동네 극장, 갤러리를 흉내 낸 카페갤러리들, 북 페어를 흉내 낸 진 페어 등등. 예술 영역은 이런 행위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렇다면 흉내 내기의 느슨한 연대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00도큐멘트를 진행하면서, 서울이라는 지형 안의 여러 조건을 고려했을 때 가장 필요했고 절실했던 것이 이 부분이었다. 특히 자본과 국가 제도의 ‘결혼’에 의해 공공 문화 영역이 만들어지는 현실을 감안해보자면(지금 대부분 공공영역문화 기관은 공적 기금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데, 공적 기금이라는 말 자체가 자본과 국가의 결합의 산물이다), 대안적 공공영역은 그 안에서 다른 방식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역할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 경제라고 이야기할만한 무언가가 도출될 것 같다.


C. 결론 : 00도큐멘트의 도구들

00도큐멘트는 문화예술 영역 안의 다양한 움직임과 활동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다양한 영역은 문화예술 일반에 국한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계속 강조되는 것처럼 문화예술 영역의 결과물이 한 개인의 열정이나 천재성에 국한되지 않고 영역 사이의 움직임을 형성하는 지식 생산과정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기획은 자율주의, 공공영역, 공공예술, 민중미술, 다중 등의 여러 개념들 안에서 안착하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00도큐멘트의 여러 리서치의 대상들이 하나의 지식 생산과정의 주체로 인식될 수 있다면, 이들을 그람시가 언급했던 ‘유기적 지성’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유기적 지성은 교육 과정이나 제도적 뒷받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공동체 예술이 가질 수 있는 규모의 정치, 소통을 넘어 자기 지식을 차곡차곡 기록하는 과정으로서의 데리브, 자신의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하는 대안적 경제 개념 등은 지금의 조건 안에서 공공영역과 예술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은 도시 생활을 분열과 불안의 ‘ 이방인(Der Fremde)의 삶’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이방인은 오늘 와서 내일 머무는 자이다. 노마드와 다르게 이방인은 잠재적으로만 방랑할 수 있는 자이고, 한 사회 안에 다른 요소를 끊임없이 투여하는 작인(agent)이다. 공공영역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은 어쩌면 이런 이방인들이다. 00도큐멘트라는 작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발견한 것은 아주 느슨하고 가냘퍼서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런 부서짐은 특정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 여러 이방인들, 자신의 영역 안에 끊임없이 다른 요소를 투여하는 자들 때문일 것이다.